서체는 그 자체가 특정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디자이너의 시각적 창작물이자 한 시대와 문화의 산물입니다. 세리프 서체인가 산세리프 서체인가, 세리프가 있다면 어떤 모양인가? 돌에 새겨진 글자를 기반으로 만들어 졌는가? 펜글씨를 본뜬 서체인가?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인가, 모더니즘의 정신을 담고 있는가 등등 하나의 서체를 둘러싼 다양한 정보와 형태에 대한 이해는 모두 디자이너의 시각적 선택의 근거이자 문제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서체의 분류'는 서체를 이해하고 조직하는 도구가 되어줍니다. 이 도구는 현재 존재하거나 앞으로 등장할 수많은 서체의 분류에 도움을 주며,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서체에 대한 이해는 보다 합목적적이고 지적인 서체 선택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서체를 분류하는 방법은 분류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타이포그래피 학자마다, 또 서체 회사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복스의 서체 분류법을 근간으로 서체의 분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분량이 많은 관계로 3회에 걸쳐 연재할께요.
1회 - 휴머니스트, 게럴드, 트랜지셔널, 디돈, 슬랩세리프
2회 - 산세리프(그로테스크, 네오 그로테스크, 지오메트릭, 휴머니스트 산스)
3회 - 글리픽, 스크립트, 디스플레이, 블랙레터, 모노 스페이스, 확장 패밀리
프랑스의 타이포그래피 역사가 막시밀리언 복스의 서체 분류법은 국제 타이포그래피협회(ATypI:Association Typographique International)에 의해 표준 분류법으로 채택되면서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표준 시스템으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최근 들어 복스의 시스템은 주로 본문용 서체의 분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 디지털 폰스 시대에 탄생한 새로운 차원의 서체들을 포함할 수 없다는 점 등이 그 한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에 따른 형태의 변화와 그 특징을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유효한 도구 입니다.

Centaur Regular 130pt
1450년대에 등장한 최초 인쇄물의 성공 여부는 '펜으로 쓴 손글씨와 얼마나 비슷해 보이는가'에 있었습니다. 인쇄는 독일의 마인츠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나 초기 인쇄 문화의 꽃이 핀 곳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였습니다. 르네상스의 주역이어던 인문주의 학자들은 새로운 텍스트를 담아낼 수 있으며 당시 유럽에서 사용되던 블랙 레터와는 차별되는, 손글씨 양식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5, 6세기 전에 표준 손글씨로 정립되었던 '카롤링거 왕조의 소문자(Carolingial minuscule:'를 본보기로 하여 획이 가늘고 모양이 둥글며 글자의 속 공간이 밝게 드러나는 손글씨양식을 개발·사용했습니다. 15세기 베네치아의 인쇄물에는 이 인문주의 학자들의 손글씨 양식을 흉내낸 활자가 대거 등장했습니다. 이 양식을 '휴머니스트(Humanist) 스타일', '베네치안(Venetian) 스타일' 이라고 부릅니다.
휴머니스트 스타일의 특징은 획의 굵기변화가 일어나는 부분, 획의 시작과 끝 부분, 소문자 'e'의 가로획이 기울어진 부분 등에서 손글씨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점, 소문자 'a'의 둥근 볼(bowl)이 낮게 위치한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전형적 휴머니스트 스타일 서체로는 '센토(Centaur)', '케널리(Kennerley)', '골든 타입(Golden Type)'등을 들 수 있습니다.

Adobe Garamond PRO Regular 130pt
게럴드는 베네치아의 인쇄·출판업자인 알도 마누치오(Aldo Manuzio)를 위해 프란체스코 그리포(Francesco Griffo)가 디자인한 서체 '벰보(Bembo)'가 중심이 되어 파생한, 서체의 군群이 가지는 형태 양식입니다. 그리포의 디자인을 계승한 클로드 게라몽(Claude Garamond)의 '게라몬드(Garamond)'가 16, 17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으로 뻗쳐나간 세리프 서체의 원천이 되었기에, 게라몬드와 알도의 이름을 결합한 '게럴드'라는 이름이 고안된 것이죠.
게럴드 스타일은 기존 펜글씨의 영향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획의 방향이나 굵기의 변화, 세리프의 모양등이 휴머니스트 스타일에 비해 보다 균정하고 일관된 특징을 가집니다.
이 양식의 전형적 서체로는 '벰보(Bembo)', '게라몬드(Garamond)', '그랑정(Granjon)', '사봉(Sabon)', '미니언(Minion)', '호플러 텍스트(Hoefler Text)'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편안한 가독성을 보장해 주는 본문용 서체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Baskerville BT Roman 110pt
트랜지셔널 스타일은, 펜으로 쓴 글자 형태에 기반을 둔 게럴드 스타일과 그 후 등장한 수학적 형태 양식 사이의 특징을 가지는, 말 그대로 과도기적 양식입니다. 이 양식의 시발점은 1700년경 프랑스 루이 14세의 명을 받아 필립 그랑정(Philippe Grandjean)이 디자인한 '왕의 로만(Romain du Roi)'입니다. '왕의 로만'은 2304개의 모듈로 이루어진 그리드 위에 글자 하나 하나를 구현한, 형태의 정교함과 수학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서체였습니다. 그리드에 입각한 정교한 형태는 18세기 활자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60여 년 후 영국의 존 베스커빌(Jhon Baskerville)의 서체 디자인으로 재현되었습니다.
트랜지셔널 스타일의 특징은 획의 굵기의 차이가 그 이전 양식에 비해 더욱 뚜렷한 점, 세리프가 더우 정교하고 예리한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이 게럴드 양식이 세련된 예라면, 글자의 둥근 부분의 축이 거의 수직에 가까워, 기계적 통일성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시각적 표현의 증거입니다.
이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서체로는 '베스커빌(Baskerville)', '푸르니에(Fournier)', '켈러도니아(Caledonia)' 등이 있습니다.

Didone BK BT Regular 128pt
서체 '디도(Didot)'와 '보도니(Bodoni)'에서 볼 수 있는 형태적 특징이 이 양식을 대변합니다. 18세기 말경 각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출현한 이 새로운 형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1700년경 프랑스에서 디자인된, 수학적 미감을 주는 '왕의 로만' 이었습니다.
디돈 양식은 가는 가로획과 굵은 세로획이 세리프 없이 직각으로 만나고, 글자의 모양이 기하학적 형태에 바탕을 두며 비례는 수학적으로 고려된, 펜글씨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진 서체 양식입니다. 디돈스타일의 출현과 인기는, 가는 획과 또렷한 대비를 표현할 수 있었던 당시 전반적 인쇄술의 발달과 시대 미의식의 변화에 힘입어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디돈양식의 전형적 서체로 디도와 보도니 외에도 '발바움(Walbaum)', '페니스(Fenice)' 등이 있습니다.

Clarendon Regular 99pt
사전에서 '슬랩(slab)'을 찾아보면 '(목재나 서판의) 넓적하고 두꺼운 조각'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두꺼운 조각'은 이 서체 양식을 대표하는 각지고 굵은 세리프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는 산업혁명 시대의 시각적 산물입니다. 19세기에는 기계생산으로 가능해진 대량생산과 판매가 진행되면서 바야흐로 광고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많은 광고물 사이에서 주목을 끌고 강한 시각적 인상을 줄 수 있는 서체에 대한 요구가 증대했고 세리프의 굵기와 모양에서 극단적 표현까지 등장했습니다.
슬랩 세리프 양식은 장방형의 굵은 세리프가 비슷한 굵기의 기둥(stem)과 직각으로 만나는 '이집션(Egyptian)' 양식과 장방형의 세리프가 기둥과 곡선(bracket)으로 연결되는 '클라렌든(Clarendon)' 양식으로 나뉩니다.
이집션 양식의 대표 서체로는 '멤피스(Memphis)', '록웰(Rockwell)', '세리파(Serifa)' 등이 있으며, 클라렌든 양식은 '클라렌든(Clarendon)', '센추리(Century)', '멜리어(Melior)' 등이 있습니다.